양구 가오작리 선돌(佳伍作里立石)
<양구선사박물관>
선돌은 태양숭배에 따른 신앙의 표시, 지역을 나누는 경계의 표시, 축복과 행운을 기원하는 표시 등 기능적 성격과 관련된 단순한 구조물로 그 위치나 형태, 시대에 따라 그 기능과 역할이 변화되어 왔으며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넘어오면서 선돌에 글자를 새기거나 음각하여 인간의 모습을 구체화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는데 이는 벽사적(酸邪的) 수호기능과 축복과 행운을 주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선돌은 남면 광치령 절터골에서 가오작리의 군사시설용으로 옮겨진 것을 양구선사박물관 개관과 더불어 1998년 7월 이곳으로 이전 복원하였다.
*가오작리 선돌(佳伍作里立石)
선돌은 길쭉한 돌을 그대로 또는 약간 손질하여 세운 사람의 의지가 깃들인 돌기둥인데 입석(立石 menhir)이라고도 한다. 고인돌과 더불어 대표적인 큰돌문화[巨石文化]에 속한다. 고인돌에 비교하여 볼 때 우리나라에는 많이 분포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선돌 자체가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조사가 활발하지 않았던 데 그 원인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근대화 과정에서 간간이 그 문화전승이 파괴·단절되면서 없어진 것이 많다. 분포지역은 함경도부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이며, 우리와는 축조양태가 다르지만 프랑스의 브르타뉴를 비롯한 서부 유럽과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 동남 아시아 지역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데 고인돌과 거의 같은 분포권을 보이는 점이 주목된다.
*선돌 얼굴문양
돌을 세웠거나 서 있다는 뜻에서 선돌 이외에 삿갓바위[笠巖]·입암(立巖)이라고도 부르며, 지역에 따라서는 구지바위·할머니탑·할아버지탑·돌장승·수구막이·수살장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말레이시아에서는 전사(戰士)라고도 한다. 생김새는 대부분 길쭉한 모양의 돌기둥이지만 가끔 넓적한 판석도 있다. 세워져 있는 끝부분이 뾰족한 것과 뭉툭한 것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남성을 상징하고 후자는 여성을 나타낸다고 여겨지고 있다. 간혹 선돌에 줄무늬나 원을 새긴 것, 그리고 홈이 파여 있는 것이 있다. 원이 새겨진 것은 옥천군 안터1호 선돌에서, 줄무늬가 있는 것은 대청댐 수몰지역 언저리인 옥천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선돌을 세운 당시 사람들의 삶을 재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 7개의 홈이 팬 것은 대부분 칠성믿음과 연관되며, 아들을 바라는 기자믿음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선돌이 그러한 기원(祈願)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선돌이 있는 곳은 거의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나 평지이고 가끔 낮은 구릉지대나 논·밭 가운데, 그리고 고인돌 옆에 있는 경우도 있다. 고인돌의 옆에 있는 경우로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 금내리와 영암군 입석리, 광주 충효동, 충북 청원군 아득이, 옥천군 안터 등에서 보여진다. 지금까지 조사된 몇 가지 예를 보면 이것은 제단을 나타내는 의미보다 묘표적(墓標的)인 성격이 더 짙은 것 같다.
선돌의 기능은 크게 3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대부분 의인화되어 있다. 첫째, 암석·칠성·성기 숭배에서 나타나듯이 다산·생산·장수를 바라는 풍요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둘째, 벽사( 邪)·수구막이의 역할을 하는 선돌은 수호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이것은 1쌍으로 있든지 성(性)의 구별이 뚜렷한 점이 특징이다. 셋째, 죽은 사람을 상징하거나 무덤을 표시하는 무덤돌의 기능이다. 선돌이 세워진 시기는 선사시대부터 최근까지 계속 이어져오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의 것을 말하며, 대체로 고인돌과 같은 시기인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2007.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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