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서라벌문화권

경주 신문왕 만파식적길

蔥叟 2006. 12. 18. 09:03

경주 신문왕 만파식적길

 

   신라 31대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으러 감은사를 방문할 때 왕이 수레를 타고 갔던 길은 어디일까? 왕경에서 토함산을 넘어야 하는데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은 어느길일까? 그 길은 왕경 - 모차골 - 서낭당 고개 - 세수방 - 불령재 - 용연 - 기림사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비교적 평탄하여 마차가 다닐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추원마을

 

*추원사

 

*모차골의 팬션

 

*암자

 

   추원마을을 지나 모차골 입구에 다다르자 작은 암자가 있었다. 암자에는 최근에 조성한 예쁜 삼층석탑이 있었고 산신령상, 포대와상 등의 조각들이 여러 점 있었다. 모차골은 본디 마차골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모차골로 변했다고 한다.

 

*석탑

 

 *모차골 입구

 

*축대

 

*축대

 

*서낭당고개

 

   서낭당 고개에 오르자 멀리 동해바다가 가물거리고 달을 머금은 산이란 예쁜 뜻을 지닌 함월산(含月山)이 바라다 보인다. 서낭당 고개를 지나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세수방(洗手坊)이다. 세수방이란 이 개울물에서 임금님을 모시고 가던 일행이 세수를 하고 피곤한 몸을 쉬어 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리라.

 

*함월산

  

*불령(佛嶺)

 

   다시 길은 계속 이어지고 야트막한 고개를 만난다. 부처고개 즉 불령재다. 고갯마루에 명문이 새겨진 비석이 하나 비스듬히 누워있다. 불령봉표다. 延慶墓香炭山 因 啓下 佛嶺封標(연경의 묘에 쓸 숯을 생산하기 위한 산이므로 임금의 명을 받들어 불령에 봉표를 세운다)라는 글씨가 뚜렷하다. 연경은 조선 순조임금의 맏아들인데 병약하여 일찍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의 묘에 쓸 숯을 굽기 위한 나무이니 일반인들이 베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이곳에 뵹표를 세웠다.

 

   봉표 옆면에는 봉표를 세운 연도와 세운이의 이름이 새겨진 글자가 보이지만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어렵다. 하지만 가까운 감재에 있는 시령봉표에는 '辛卯十月 日 墓監 臣 金昌祜 監董 臣 李命喜'라고 새겨져 있어 여기도 거의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신묘년은 순조 31년(1831)에 해당한다.

 

*불령봉표(佛嶺封標)

  

*도통골

 

*코끼리 바위

 

*용연폭포 상류

 

*용연폭포 상류

 

*용연폭포 상류

 

*용연폭포

 

*용연폭포

 

   이제 용연폭포가 보인다. 신문왕이 대왕암에서 만파식적을 얻어 돌아가는 길에 점심을 먹었다는 곳이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는 기림사(祈林寺) 서쪽 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참을 치렀다. 태자 이공(理恭)이 대궐을 지키다가 이 소문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와 치하하면서 천천히 살펴보고 말하기를, "이 옥대에 달린 여러 개의 장식은 모두가 진짜 용들입니다" 하니 왕이 물어서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옥 장식 한 개를 따서 물에 담가 보여드리지요" 하고는 곧 왼쪽에서 둘째 옥 장식을 따서 개울물에 담그니 즉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곳은 못이 되었으니 이 때문에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이름지었다.

 


<삼국유사 만파식적(萬波息笛)조>

 

   용연폭포에서 기림사는 지척이다. 이길을 신문왕은 마차를 타고 왔던 것이다.

 

*용연폭포

   

*용연폭포

 

 

 

<2006. 1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