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송화산 출토 석조반가사유상
<국립경주박물관>
반가사유상은 왼쪽 다리를 내리고 오른쪽 다리를 얹은 일종의 반가부좌 자세로 왼손은 오른쪽 다리의 발목을 잡고, 오른팔꿈치는 무릎 위에 붙인채 손가락을 뺨에 살짝 대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보살상을 말한다.
원래 이 상은 부처가 태자였을 때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출가하여, 중생구제라는 큰 뜻을 품고 고뇌하는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에서 유래한 것이다. 인도에서는 3세기경 간다라와 마투라 조각에 나타나며, 불좌상의 양협시상에서 점차단독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경우는 5세기 후반 윈강[雲岡] 석굴에서 이미 나타나지만 6세기 후반 북제시대에 가장 성행했으며, 명문을 통해 주로 태자사유상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가사유상
그러나 우리나라와 일본의 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로 추정하고있다. 석가모니 이후에 나타날 미륵불이 지금 미륵보살로서 태자사유형의 자세를 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도상이며, 신라에서는 화랑을 미륵과 연결시켜 흔히 미륵보살반가상(彌勒菩薩半跏像)이라고 불렀다. 삼국시대인 6세기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통일신라 초기까지 많은 반가사유상이 금동 또는 석조로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당시의 신앙경향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예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국보 제78호와 국보 제83호의 금동미륵보살산가상을 비롯하여 봉화에서 출토된 반가사유상을 들 수 있다. 이 반가사유상은 일본에도 전해져 아스카[飛鳥] 시대와 하쿠호[白鳳] 시대에 많이 제작되었는데, 특히 고우류 사[廣隆寺]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은 국보 제83호의 반가사유상과 거의 같은 형태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많은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진 점이나 당시 삼국과 일본 간의 교류관계를 살펴볼 때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가사유상
송화산 출토 석조 반가사유상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쪽 송화산 기슭에 있는 김유신장군 묘의 재실(齋室)인 금산재에서 1909년 발견된 것으로 머리 부분과 양 팔이 절단되어 없어지고 몸체도 마멸이 심해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 아니다. 상체는 나형(裸形)으로 앞으로 약간 숙인 자세이며 목걸이 장식이 남아 있다. 아래로 늘어뜨린 왼쪽 무릎 위에는 오른쪽 다리를 얹고 그 위에 왼손이 놓여져 있으며 턱 밑을 받쳤던 오른손 팔꿈치 일부가 오른쪽 다리 위에 남아 있어 반가사유의 자세를 한 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허리에 두른 군의(裙衣)는 약간 두툼하게 처리되었고 대좌 전체를 덮으면서 길게 늘어져 겹쳐진 옷자락의 끝은 부드러운 굴곡선으로 마무리되었다. 양쪽 허리로부터 늘어진 군의의 띠자락은 대좌의 좌우 측면에서 밑에까지 내려와 장식적인 효과를 준다. 대좌는 상의 뒷면에서 보면 허리부분이 잘록한 원통형으로 그 밑에 1줄의 음각선이 둘러진 간단한 형태이다. 이와 같이 사방에서 볼 수 있게 원각(圓刻)으로 조각된 석조반가사유상은 경북 봉화군 물야리(勿野里)에서 출토된 예가 있기는 하나 현존하는 우리나라 불상 중에서는 보기 드문 원형조각상이다. 이 석조반가사유상은 봉화 출토의 반가상과는 형식면에서 약간 다르며 조각기법이 약간 앞선 것으로 보아 대략 6세기말 또는 7세기초의 조각으로 추정된다.
<2006.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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