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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터 무학대사홍융탑

蔥叟 2017. 7. 22. 06:56

양주 회암사터 무학대사홍융탑

 

무학(無學)[1327~1405]은 삼기(三岐)[현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출신으로 속성은 박씨(朴氏)이고, 휘는 자초(自初), 당호(堂號)는 계월헌(溪月軒)이다. 1344년(충혜왕 복위 5) 18세에 출가하여,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 불법을 배웠고, 1346년(충목왕 2) 부도암에 머물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진주 길상사(吉祥寺)와 묘향산 금강굴(金剛窟) 등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1353년(공민왕 2) 원나라 연경(燕京)으로 가서 원에 와 있던 지공(指空)과 나옹(儺翁)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홍융탑

 

1356년(공민왕 5) 귀국하여 나옹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1376년(우왕 2) 나옹이 회암사에서 낙성회(落成會)를 열 때 수좌(首座)로 초청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392년(태조 1)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어 회암사에서 거처하였다. 이듬해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을 오가며 지상(地相)을 보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도움을 주었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우고, 1402년(태종 2)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 머물다가 1405년(태종 5) 입적하였다.


높이는 약 2.7m로, 장대석(長臺石)을 2단으로 쌓아 높고 널찍하게 전체 8각을 이루는 석단(石壇)을 마련하였다. 석단의 각 모서리에는 정상부를 보주 모양으로 장식한 네모난 돌기둥을 세운 뒤, 그 기둥과 기둥 사이에 넓은 장대석을 끼워 넣었다. 난간을 둘렀는데, 이것은 석단 중앙에 위치하는 탑을 보호하는 일종의 장식물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기본적으로 팔각원당형의 부도를 중심에 세우고 그 주변에 석단을 마련하는 것은 이전 시기에 볼 수 없는 새로운 형식이다.

 

부도의 가장 아랫부분인 지대석은 1장의 8각 석재로 각 면에는 구름무늬를 굵은 선으로 조각하였는데, 각 모서리의 구름무늬가 유난히도 크게 장식되었다. 상대·중대·하대로 구성된 기단부 중 하대석은 겹연꽃무늬가 귀꽃과 함께 화려하게 덮여 조각되었으며, 그 위의 8각 중대석은 모를 죽여 둥글게 배가 부른 형태로 다듬었다.

 

중대석의 각 면에는 내부에 모서리가 안쪽으로 접힌 네모꼴의 안상을 조각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꽃무늬가 양각되어 있다. 연꽃 받침과 8각 받침석으로 이루어진 상대석은 연꽃무늬가 하대석과 같지만 귀꽃 장식이 없다. 앙련 위의 8각 받침석의 각 옆면에는 네모꼴의 구획을 마련하고 그 내부에 당초(唐草) 넝쿨무늬를 가득히 새겼다. 괴임돌 없이 윗면이 평편하게 처리된 상대석 위의 탑신은 구형(求型)으로, 표면에는 운룡(雲龍) 무늬가 가득 조각되어 있다. 특히 용의 머리, 몸체, 비늘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이 있으며, 뒤엉킨 용의 몸체 사이에 구름무늬를 빈틈없이 빼곡하게 조각하여 구름 속을 날고 있는 용에게서 생동감이 느껴진다. 용과 구름무늬가 조화를 이루어 상서로운 기운을 한층 더해 준다.

 

▲홍융탑 몸돌

 

 

 

<2017. 6.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