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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하라 시내를 걷다 - 일본 대마도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蔥叟 2016. 2. 23. 06:18

이즈하라 시내를 걷다 - 일본 대마도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半井桃水, Nakarai Tosui

 

나카무라 지구에 폐가로 방치되어 잇던  나카라이 토스이 생가를 2007년에 증축보수한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나카라이 토스이는 의사였던 부친이 초량왜관에서 開院醫였기 때문에 부친을 따라서 어릴적 부터 부산에서 살되되어 거리의 엿장수들과 놀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배우게 되어 소년시절부터 한국어에 능통했다. 또한 서민들과 친숙하게 지내고 의사인 부친의 병원조수로 일하면서 생명의 존엄성을 일찍 깨달아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사상이 일찍 싹텄다.

 

1868년 명치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그때까지 대마도번에서 임명하는 관수가 관리운영하던 초량왜관을 일본의 중앙정부가 1869년부터 접수 운영하게 된다. 그래서 미쓰이구(三井組), 미쓰코시(三越)백화점 계통의 일본상사가 조선과 외교절차도 없이 종업원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조선정부는 이러한 행위는 외교적 관례를 무시한 처사라고 격노하여 왜관정문에 항의 격문을 부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은 이 항의문 번역을 토스이에게 부탁했고 번역문장은 그대로 일본정부에 전달되었다. 사이코 다까모리 등에 의하여 필어나기 시작한 정한론이 한층 거세졌다. 편화주의자인 나카라이는 자신의 벽보번역이 정한론을 자극한 것이 아닌가 하고 자책했다고 한다. 

 

1876년 일어난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의 여론은 광분하지만 당시 유력일간지인 동경일보등은 평화주의 논설을 쓰고 있었는데 15세 소년 토스이는 동경일보에 무력반대 글을 투고하기도 했다. 1882년 임오군란을 보도한 것이 계기가 되어 1884년 아사히 신문 기자가 되었다. 1882년 일본 최초로 춘향전을 번역하여 오사카 아사히 신문에 계림야화 춘향전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였다.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2016. 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