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을 찾아서 - 해남 녹우당 어초은 묘소
어초은 사당을 지나 숲 속으로 들어가면 그의 묘소가 나온다. 부인인 초계정씨와 함께 쌍분으로 저성되어 있다. 어초은 윤효정(尹孝貞 1476~1543)은 김종직(金宗直)선생의 문하인 금남 최부((錦南 崔溥)선생과 유제 림우리(幽齊 林遇利), 성은 류계린(城隱 柳桂隣)의 가르침을 받아 학문을 다지신 성리학자로서 퇴계선생(1501년:연산군 7년 )보다는 25년 율곡선생(1536년:중종 31년)보다는 60년 먼저 태어나신 분이며 학문이 뛰어나 해남향인들의 마음을 크게 열어 밝게 가르치게 하여주었다.
어초은은 당시의 산림학자들이 명리의 그늘에서 벗어나 산촌의 삶 속에서 성리학의 실천을 추구하듯이 자신의 아호를 고기잡고 땔나무하는 숨겨진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간 인물이다. 그의 적덕(積德)은 1702년에 간행한 해남윤씨족보(임오보) 2권의 어초은공 행적란에서 볼 수 있는데 "어초은 유음덕 윤씨지업 복진어차(漁樵隱 有陰德 尹氏之業 復振於此)"란 기록은 어초은공께서 해남주민 일부가 한해(旱害) 또는 수해(水害)로 인하여 나라에서 각 가정에 지정한 세곡(稅穀)을 납부하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안타까운 실정을 보고 창고를 3회에 걸쳐 열어 세곡(稅穀)을 대신 납부해 주어서 많은 주민들이 감옥에서 풀려났다는 소문에 해남 주민과 유림들이 적선(積善)의 고마운 뜻을 각 고을 및 한양에까지 전하므로 해남윤씨가 더욱 빛났으며 그의 아들 대(代)에 와서 크게 가세(家勢)가 융성하여 가문의 기반이 다져진 뒤 자손들의 과관(科官)과 절의(節義)가 면면히 이어져 일찍이 호남지방(湖南地方)에 자리를 잡고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혀왔다. 그 후 더욱 많은 유명인물들이 나오면서 해남윤씨의 기반은 튼튼해지고 반성(班姓)으로의 각광을 받았다.
▲어초은 묘소
▲어초은 묘소
▲어초은 묘소
<2015.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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