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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산문의 원향 - 화순 쌍봉사 삼층목탑

蔥叟 2014. 12. 23. 08:55

사자산문의 원향 - 화순 쌍봉사 삼층목탑

 

쌍봉사는, 신라 경문왕 때 중국에서 남종선(南宗禪)을 전수한 철감선사 도윤(澈鑒禪師 道允)이 귀국하여 지은 절인데, 그의 도호가 쌍봉(雙峰)이었으므로 쌍봉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철감선사는 법력과 덕망이 높아 왕이 스승으로 삼기도 했는데, 그는 이 쌍봉사에서 9산 선문(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곳 쌍봉사에서 철감선사로부터 종풍(宗風)을 이어받은 징효(澄曉), 훗날 영월 흥녕사(興寧寺, 지금의 법흥사)에서 사자산문을 열면서 열매를 맺는다.

 

▲삼층목탑

 

▲삼층목탑

 

▲삼층목탑

 

근래에 세워진 일주문에 쌍봉사자문이라는 문구를 넣어 사자산문의 뿌리가 쌍봉사임을 자랑하는 듯하다. 철감선사는 28살 때 당나라로 건너가 선종을 공부하였다. 847(문성왕 8), 범일국사와 함께 돌아와 금강산에 머무르며 수행하던 중, 화순땅에 들렀다가 이곳의 아름다운 산수에 이끌려 쌍봉사를 지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 중전을 거듭하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28(인조 6), 1677(현종 8), 1724(경종 4)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총높이 12m의 정방형 3층 건물인 대웅전은,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서 3층 목탑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로, 보물 163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19844월 초에 촛불 실화로 인한 화재로 재로 변해 버렸다. 목탑이 불타기 전인 1962년 해체 복원 당시 3층 중도리에서 1690(숙종 16)에 두번째의 중건이 있었고, 1724년에 세번째 중건되었음을 알려주는 사실이 기록된 상량문이 나오기도 했다. 그 후 1962년의 실측도를 토대로 다시 지은 것이 지금의 대웅전이다. 대웅전 상륜부를 장식하고 있는 청동 머리장식. 기와를 사용한 노반 위에 네모의 앙화(?)를 올리고, 그 위에 청동 보륜을 올렸다. 공주 마곡사를 가시면, 대웅보전 앞 석탑의 상륜부에 장식되어 있는 청동 머리장식과 비교해 보면 흥미로울 것으로 생각된다.

 

▲삼층목탑

 

▲삼층목탑

 

▲삼층목탑

 

▲삼층목탑

 

상륜(相輪)이나 찰주(擦柱)가 없어 탑이라고 보기는 힘드나 전체적인 형태가 3층목탑의 형식을 가지고 있어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목탑의 예로써 귀중하다. 1963121일 보물 제163호로 지정되었으나, 198443일 화재로 소실되어, 1984530일 보물 지정이 해제되었다. 복원공사는 문화재관리국이 그간 자료를 수집하여 198585일 착공하여 19861230일 준공,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1962년에 해체·수리하던 중 3층 종도리에서 묵서한 상량문이 나왔는데, 그에 따르면 원래 3층전(三層殿)이라 불렸으며 1690(숙종 16)2중창했고, 1724(경종 4)3중창했다고 한다.

 

1984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3층의 정방형 단칸집으로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그대로 지닌 탑파형 건물이었다. 3층의 무게를 지탱해야 했으므로 커다란 자연석 주초 위에 투박하게 마름질한 굵은 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로 1층은 토벽, 2·3층은 판벽(板壁)으로 처리했다. 2·3층으로 올라갈수록 기둥의 높이가 급격하게 낮아지는 체감법(遞減法)을 사용했는데, 이는 고층건물이 주는 불안감과 위압감 대신에 안정감을 주고 건물 수명을 늘리기 위해 고안해낸 방법으로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지붕의 무게로 인해 추녀머리가 숙여지지 않도록 건물 중앙에 굵은 찰주(刹柱)를 세웠다. 1962년에 해체·수리하던 중 3층 종도리에서 묵서한 상량문이 나왔는데, 그에 따르면 원래 3층전(三層殿)이라 불렸으며 1690(숙종 16)2중창했고, 1724(경종 4)3중창했다고 한다. 쌍봉사 대웅전은 지금은 별로 전하지 않는 목탑의 모습을 알려주는 건물이었으나 실화로 소실되었다.

 

▲삼층목탑

 

▲삼층목탑

 

▲삼층목탑

 

 

 

<2014.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