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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순례 - 경주 남산 장창골 출토 석조미륵삼존불

蔥叟 2012. 12. 28. 02:28

남산순례 - 경주 남산 장창골 출토 석조미륵삼존불

<국립경주박물관>

 

   1924년 경주 남산 장창골 한 석실에서 발견되어, 그 이듬해 박물관으로 옮겨온 불상이다. 삼화령 미륵삼존불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까닭은 삼국유사 '생의사석미륵'조에 전한다.

 

선덕여왕 때 중 생의는 언제나 도중사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꿈에 한 중이 그를 데리고 남산으로 올라가서 풀을 매어 표를 해놓게 하더니 남쪽 골짜기로 와서 말했다.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은 이를 파내다 고개 위에 편히 묻어 주시오." 꿈에서 깨자 그는 친구와 함께 그 골짜기에 이르렀다. 표해 놓은 곳을 찾아 땅을 파보니 거기에 석미륵이 나왔으므로 삼화령 위로 옮겨 놓았다. 선덕왕 13년 갑진(644) 에 그 곳에 절을 세우고 살았는데 후에 절 이름을 생의사라고 했다.

-지금은 그릇 전해져 성의사라 한다. 충담사가 해마다 33일과 99일에 차를 달여서 공양한 이는 곧 이 부처님이다.-

 

<삼국유사 생의사석미륵조>

 

   요컨데 선덕여왕 3년, 즉 634년에 경주 남산 삼화령 생의사라는 절에 있던 미륵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불상처럼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와 같은 얼굴의 표현이나 4등신의 신체표현을 한 불상이 주로 7세기 전반에 조성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위의 기록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이 삼존불과 같이 의자에 앉아있는 미륵불을 찾아볼 수 없지만 중국에서는 대부분의 미륵불이 의자에 앉아 있는 예가 많아 이 삼존불을 미륵삼존불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미륵삼존불과 관련된 이야기가 더 있는데, 안민가와 찬기파랑가와 같은 향가를 지은 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인 충담스님이 이 미륵불께 3월 3일과 9월9일에 차를 달여 공양하였다고 한다.

 

33일에 왕은 귀정문의 누상에 나아가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누가 도중에서 능력 있는 스님을 한 사람 데리고 올 수 있겠소."

이 때 마침 큰 스님이 위의를 갖추고 지나가고 있었다. 좌우의 신하가 바라보고 그를 데리고 와서 왕께 뵈었다. 왕이 말을 하였다.

"내가 말하는 위의를 갖춘 스님이 아니다." 하고 물리쳤다. 

 

다시 스님 한 사람이 납의(納衣)를 걸치고 앵통(櫻筒)[혹은 삼태기를 걸머졌다 함]을 걸머지고 남쪽에서 왔다. 왕은 기뻐하며 누상으로 인도하였다. 앵통의 가운데를 바라보니 다구(茶具)만이 가득하여서 왕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스님이 대답하였다.

"충담이라 하옵니다." 왕이 물었다.

"어디에서 왔소?" 스님이 대답하였다.

"저는 3월 삼짇날과 9월 중양절이면 차를 다려서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드립니다. 오늘도 차를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왕이 말을 하였다. "나에게 차를 한 사발 주시겠소?"

스님은 차를 다려 왕께 드렸는데 차 맛이 이상하고 그릇 속에 향기가 그윽하였다.

 

왕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스님께서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思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요?"

"그렇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할 노래를 지어 주오."

스님은 즉시 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그를 가상히 여겨 왕사(王師)로 봉하니 스님은 두 번 거듭 절하고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삼국유사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조>

 

▲석조미륵삼존불

 

▲석조미륵삼존불

 

▲석조미륵삼존불

 

▲석조미륵불

 

▲석조미륵불

 

▲석조미륵불

 

▲석조미륵불

 

▲석조미륵불

 

▲석조미륵불

 

▲좌협시보살상

 

▲좌협시보살상

 

▲좌협시보살상

 

▲좌협시보살상

 

▲좌협시보살상

 

▲좌협시보살상

 

▲좌협시보살상 발

 

▲우협시보살상

 

▲우협시보살상

 

▲우협시보살상

 

▲우협시보살상

 

▲우협시보살상

 

▲우협시보살상

 

▲우협시보살상 발

 

 

 

<2012. 1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