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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낙양 용문석굴 만불동(万佛洞, Wànfódòng)

蔥叟 2010. 10. 4. 06:23

중국 낙양 용문석굴 만불동(万佛洞, Wànfódòng)

  

   만불동은  용문 서산의 중부 북단에 자리잡고 있다. 만불동 안에는 만 5천여존의 불상이 조각돼 있는데, 이로 인해 만불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만불동은 당 고종과 무측천의 만수무강과 사후 극락정토 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서기 680년에 개착을 시작해다고 적혀있다. 당나라 조정에서 고종을 대신한 무측천의 섭정이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이다.

   

만불동(萬佛洞)

 

   만불동 입구 안쪽에는 '사문지운 봉위천황천후 태자제왕 경조 일만오천존상일감'(沙門 智運 奉爲天皇天侯 太子諸王 敬造 一萬五天尊像一龕)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천황천후는 고종과, 무측천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문 지운이 당 고종과 무측천, 태자, 제왕들을 공경하여, 불상 만 5천존을 새겼다는 내용이다. 사문  지운은 내도량(內道場)의 비구니로 당 조정 안팎에서 존경받던 인물이다. 내도량(內道場)은 왕실에서 부처님께 공양도하고 불가의 의식대로 수행도 하는 일종의 사찰로, 517년 양나라 문제가 당시의 고승 혜초 등을 청해 궁중에 머물게 하면서 경론을 강의하도록 한데서 시작되었다. 

 

   만불동에 안에 남아있는 40 여 곳의 기록을 근거로 고증한 결과, 지운선사는 내도량 승려들의 수장으로, 만불동 조성을 그녀가 지휘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무측천은 14살때 태종의 후궁으로  황실에 들어 간다. 고구려 원정에서 얻은 병고로 고생하던 태종은 649년 5월 숨을 거둔다. 모든 백성들이 상복을 입었던 27일간 장례가 끝난 뒤, 무측천은 10년 간의 궁중 생활을 정리하고 감업사(感業寺)로 출가해 비구니가 되었다. 이 때 측천의 나이는 24살 이었다. 당시 황궁에서 북쪽으로 통천방, 금파교를 지나 마차로 두어시간을 달려가면 울창한 삼림으로 둘러쌓인 곳에 감업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감읍사는 당 고조 이연을 비롯한 황실 조상들의 평안을 소원하는 황실 전용사찰이었다.

 

   태종이 죽은 뒤 아이를 낳지 못한 황궁의 비빈들은 나이가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모두 삭발을 해야했다. 귀비, 숙비, 덕비, 소의, 소용, 소원, 수의, 수용, 수원, 첩궁, 미인, 재인, 보림, 채녀 등등 지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머리를 깍아야 했던 황궁의 여인들은 200명을 넘었다고 한다.  강제로 출가해 계를 받고 비구니가 된 비빈들 가운데 몇몇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몇몇은 굶어죽고, 몇몇은 미쳤다고 한다. 측천의 법명은 혜통(慧通)으로 알려져 있다.

 

▲주존아미타불

  

  태종 사후 이틀 뒤 이치가 고종 황제로 즉위했다. 무측천은 태종이 죽기 전부터 태자 이치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부적절한 관계는 무측천의 일생을 바꾸는 결정적인 디딤돌이 되었다. 측천은 고종보다 4살이 많았다. 고종 이치는 감업사에 있는 측천을 잊지 못했다. 태종 1주기가 되는 날 이치는 감업사에서 측천과 다시 부적절한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3년 탈상 뒤에는 그녀를 궁궐로 데려 갈 것을 약속한다. 측천이 비구니로 감업사에 남아있는 동안 측천보다는 이치가 더 힘들어 했다. 때문에 이치는 몇 차례에 걸쳐 아슬아슬한 장면을 연출하며 비밀리에 감업사를 찾아 측천과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 갔다.

 

   태종 3년 상이 끝나는 날 측천은 이치와 함께 황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궁중에서의 치열한 암투와

권력 쟁탈전 과정에서 승자로 남아 중국 역사상 가장 부유한 시대를 이끈 여자 황제로 등극했다. 무측천이 비록 환속했지만 그녀의 주변에는 상당한 규모의 비구니 집단이 머물고 있었고, 이 비구니 집단은 무측천에게는 매우 큰 정치적 지지 세력이 되었다. 지운선사는 바로 그들의 지도자였던 셈이다.

 

   만불동 석굴에는 7존의 대불상이 모셔져 있다. 정중앙 주존 아미타불은 높이 5.65m, 연화대위에 결가부좌로 앉았다. 얼굴은 보름달 같이 풍만하고 양미간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백호가 뚜렸하다. 신체 후면에 원광과 광배를 조각했다. 왼손은 무릅위에 가지런히 놓고, 오른손은 가슴높이로 자연스럽게 들어올렸다. 설법하는 자세로 빈양동 아미타불과 같은 설법인이다. 아미타불 양쪽으로 두 제자와 두 보살, 두 명의 천왕이 시립했다. 좌측 가섭, 우측 아난이다. 두 보살의 부드러운 자태와 화려한 복장은 당시 궁정 귀부인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양측에 갑옷을 입고 야차를 밟고 선 모습은 당대 무사들의 위무를 상정하고 있다. 주존불이 앉은 뒷면에는 <일불오십보살>도, 혹은 <아미타 52존 만다라> 조각이 새겨져 있다. 이는 정토종에서 말하는 서방 정토의 모습을 표현한 가장 오래된 조각 그림이라고 한다. 연꽃 50여 개가 이어져 있고 연꽃마다 보살이 한 분씩 좌정하고 있다.

 

▲만불동 조정(藻井)

    

   만불동에서 또 한가지 감상할 만한 것은 12명의 기악인과 춤추는 무인들이다. 기악인들은 笙(생황), 笛(피리),箏(쟁/중국 고대 현악기), 공후, 비파 같은 악기를 이용해 불고, 뜯고, 튕기는 연주 모습이 생생하다.  용문석굴 전체에서 음악 관련 조각이 남아 있는 동굴은 21곳, 여기에서 조각 기악인 176명, 크고 작은 서로 다른 악단 34조, 악기 17종을 확인할 수 있다.

 

 

 

<2010. 7.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