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29. 06:05ㆍ◈한국문화순례◈/낙동우산문화권
한국의 최동단 독도 - 울릉군 독도 동도ㆍ서도
대한민국 최동단에 있는 섬으로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1∼96번지에 걸쳐있다. 동경 131°51'~131°53', 북위 37°14'00"~37°14'45"에 위치한다. 옛날부터 삼봉도(三峰島)·우산도(于山島)·가지도(可支島)·요도(蓼島) 등으로 불려왔으며, 1881년(고종 18)부터 독도라 부르게 되었다. 이 섬이 주목받는 것은 한국 동해의 가장 동쪽에 있는 섬이라는 점도 있지만, 특히 한·일 양국간 영유권분쟁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독도전경(사진 울릉교육청)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에서 동쪽으로 약 216.8km,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약 87.4km 지점에 있다. 동도(東島)와 서도(西島)를 비롯한 89개의 부속섬과 암초를 포함한 총면적은 0.188㎢이다. 동해에서 분출한 화산섬으로 울릉도의 지질구조와 비슷하며, 상부는 조면암과 응회암, 하부는 현무암으로 되어 있다.
동도와 서도는 폭 110~160m, 길이 330m인 물길[水道]을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있다.
▲동도
울릉도에 세워진 우산국은 하슬라주 군주(何瑟羅州軍主)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에게 정벌된(512) 후부터 내륙의 왕조(신라·고려)와 조공관계를 맺고 토산물을 바쳐왔다. 11세기초 동북여진족(東北女眞族)의 침략을 받은 뒤부터 우산국은 급격하게 쇠퇴하였고, 늦어도 12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섬으로 되어버린 것 같다.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거론된 기록은
<고려사> 지리지(地理志)의 동계(東界) 울진현조(蔚珍縣條)에 비록 '혹 이르기를'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하였지만, 무릉(울릉도)과 함께 우산(독도)이 있음을 확인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울릉도라는 명칭이 정착됨에 따라 그 부속도서인 독도로 우산이라는 명칭이 이동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동도
1432년(세종 14)에 편찬된
반면에 조선왕조의
▲동도
울릉도와 독도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는 것은 17세기말
그러므로 이 요구를 조선측이 받아들인다면, 울릉도 영유권은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조선측은 이런 대마도주의 속셈을 잘 알면서도 마찰을 피하고자 하여 죽도 출어는 금지시키되, 울릉은 조선 영토임을 밝히는 서계를 대마도로 보냈다. 대마도주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1694년 다시 서계를 보내어, 조선측 서계에 있는 '울릉' 두 자의 삭제를 요청해왔다. 대마도주의 요청이 이처럼 집요하였으므로 조선측에서도 강경하게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죽도, 즉 울릉도는 조선의 판도로서 〈여지승람 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하고, 앞으로 일본 어민들의 왕래를 금한다는 내용의 서계를 대마도로 보냈다.
▲서도에서 바라본 동도
대마도주는 이런 조선측 통보에 승복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바쿠후(幕府)는 1696년에 죽도가 조선 영토임을 인정하여 어민들의 도해금지령(渡海禁止令)을 내렸다. 또 그해 여름 다시 울릉도에 출어했던 안용복은 일본 어선을 추격하여 자산도(子山島), 즉 독도를 거쳐 일본 백기주(伯耆州)에 당도하여, 울릉도에 출어했던 일본 어민들의 처벌을 주수(州守)로부터 약속받고 돌아왔다. 사정이 이에 이르자 대마도주도 1697년 동래부로 서계를 보내어, 일본 어민들의 울릉도 어채(漁採)를 금한다는 막부의 결정을 알려와서 조 일간 울릉도 영유권 분규가 타결을 보게 되었다.
울릉도 영유권 분규가 매듭지어지자, 조선정부는 그해(1697)에 3년에 1번씩 삼척영장(三陟營將) 등이 울릉도를 순찰하는 울릉도 수토제도(搜討制度)를 정식화하였는데, 그 기원은 울릉이 곧 조선판도라는 서계를 대마도로 보낸(1694) 직후에 있었던 삼척첨사(三陟僉使) 장한상(張漢相)의 울릉도 순찰에서 찾을 수 있다. 수토가 정기적으로 실시됨에 따라 동해의 지리가 밝혀졌다. 지도 작성에 있어서도 정상기(鄭尙冀 : 1679~1752)의
<동국지도 東國地圖>에 보이듯이, 울릉도와 우산의 위치와 크기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국경도 가늠하게 되었다.▲동도 동굴
1714년(숙종 40) 강원도어사 조석명(趙錫命)의 보고에 "울릉도 동쪽으로 도서가 잇달아 있고 이 섬들은 왜경(倭境)과 접하게 된다"고 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 이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독도, 즉 마쓰시마[松島]에 관한 기록인 사이토[齋藤豊仙]의
이처럼 17세기 말엽 이후 조선측의 울릉도·독도에 대한 지리적 지식이 확대되어간 반면, 일본측은 위축되어갔다. 그 까닭은 막부의 도해금지령에 따라 일본 연해민들의 울릉도 왕래가 거의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연해민들의 울릉도 왕래가 재개되는 19세기 중엽(일본에서는 바쿠후 말기~메이지[明治] 초기에 해당)에 이르러서는 도명(島名)상의 혼란도 일어났다. 다케시마[竹島 : 울릉도]가 마쓰시마[松島 : 본래는 독도에 대한 호칭]로, 오늘의 죽도[竹嶼]가 다케시마로 호칭되었는가 하면, 독도에는 량고시마[リャンコ島]라는 서양식 이름이 붙여졌다.
일본인들의 울릉도 왕래가 재개된 것은 19세기 중엽부터이지만, 그것이 조선측 수토관에 의하여 확인된 것은 1881년(고종 18)에 이르러서였다. 이에 조선측에서는 일본 외무성으로 서계를 보내어 항의하는 한편, 부호군(副護軍)
검찰사 이규원은 1882년 울릉도를 검찰하고 돌아와 그 결과를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그 요지는 개척이 가능하며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정부에서는 울릉도 개척을 결정하고 다음해부터 희망자를 모집하여 입거(入居)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점차 민호(民戶)가 불어남에 따라 1895년초에는 약 200년간 계속되어 오던 울릉도 수토제도를 폐지하였고, 이어 도감제(島監制)를 설치하여 도민 중에서 도감을 임명하게 되었다.
▲서도
그러나 울릉도에 지방관이 파견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광무 4) 내부시찰관(內部視察官)
죽도는 지금의 죽도[竹嶼], 울릉 '전도'는 울릉도와 이에 부속된 섬과 암초의 통칭이며, '석도'는 독도를 가리킨다. 석도를 훈독(訓讀)하면 '독섬' 혹은 '돌섬'이 되는데, 지금도 울릉도민들은 독도를 '독섬' 혹은 '돌섬'이라 부르고 있다. 1906년(광무 10) 4월초 울도군수
▲서도
일본 메이지 정부도 대한제국이 칙령 제41호를 반포하기 이전부터 량고시마가 한국 영토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러시아와 전쟁중인 1905년 2월 돌연 량고시마를 다케시마로 명명,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로 그 영토를 편입시켰다. 그것은 일본의 국운을 걸었다고 하는 '동해해전'(東海海戰)을 얼마 앞둔 시기로 대(對)러시아 전쟁 수행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영토편입 고시절차가 비밀스러웠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국측이 일본의 독도영토 편입을 알게된 것은 1906년 4월초였다. 참정대신(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은 이해 5월 20일자 지령 제3호를 통하여 독도의 일본영토 편입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그뒤의 한·일 양국 간 독도영유권과 관련된 교섭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대하여는 한국 정부의 외교권이 1905년 11월부터 일본에 접수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동도에서 바라본 서도
<2010. 5. 12>
'◈한국문화순례◈ > 낙동우산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국의 최동단 독도 - 울릉 독도 부채바위 (0) | 2010.05.29 |
|---|---|
| 한국의 최동단 독도 - 울릉 독도 숫돌바위 (0) | 2010.05.29 |
| 신비의 섬 울릉도 - 울릉 나리분지 투막집 (0) | 2010.05.28 |
| 신비의 섬 울릉도 - 울릉 나리분지 너와집 (0) | 2010.05.28 |
| 신비의 섬 울릉도 - 울릉 나리분지 (0) | 2010.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