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진흥왕 척경비
창녕은 가야소국 가운데 비사벌 또는 비화가야라고 불리던 곳이다. 신라 입장에서 보았을 때 낙동강 유역으로 지출하기 위한 교두보적 위치에 있다. 서라벌에서 산내와 청도를 거쳐 창녕에 이르는 이 루트를 개척하고자 많은 공을 들였을 것이다. 창녕을 거점으로 하여 대가야 등 낙동강 서쪽지역을 압박할 수 잇는 전략적 위치인 것이다.
▲비각
이 비는 삼국시대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기념비이다. 흔히 순수비로 통칭되나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순수비처럼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말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했으므로 따로 척경비라 일컫는다. 하지만 척경비는 영토를 개척한 후 기념하는 성격임에 비추어 볼 때 창녕비의 내용에는 상주와 하주의 모든 군사령관들이 총집합한 내용이 나오고 군사적 성격이 매우 강하여 '전군지휘관 회맹비'라는 주장도 있다. 단양 적성의 진흥왕비와 비의 성격이나 형태가 거의 비슷하다.
비문 첫머리의 "신사년 2월 1일 입(辛巳年 二月 一日 立)"은 진흥왕 22년(561)으로 추정되어 기존 3개의 순수비보다 수년 앞서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매끄러운 화강암의 자연 판석을 약간 다듬어 비문을 새겼으며 개석(蓋石)이 없고 인명(人名)과 관등(官等)의 표기 방식이 독특하며 고졸한 해서체 등을 지녀 신라 비석 중 가장 오랜 형식을 보여준다. 전문 642자 가운데 400여자 정도가 판독되었다. 앞 부분은 마멸이 심하고 뒷부분은 관련인사가 나열되어 있다. 모두 27행인데 재개 한 줄에 26자씩 적었고 끝줄은 3자이다.
▲비문
이 비는 원래 창녕읍 동쪽에 우뚝 솟은 화왕산(火旺山)에서 뻗어내린 목마산(牧馬山) 서쪽 언덕에 있었는데, 1914년 조거용장(鳥居龍藏)이 이 지방의 고적을 조사할 때 보통학교장(普通學校長) 교본량장(橋本良藏)을 통해 고비석(古碑石)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조사 보고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창녕은 본래 비화가야(非火加耶)가 자리한 곳이었으나 진흥왕대(眞興王代)에 신라의 영역이 되어 비자화군(比自火郡)이 설치되었다. 그후 진흥왕 16년(555)에 하주(下州)가 설치되었고, 26년(565)에 주(州)가 폐지되었다가, 경덕왕대(景德王代)에 와서 화왕군(火旺郡)으로 개칭되었고, 고려시대에 와서 창녕군으로 되었다.
비의 재료는 단단한 화강암으로 편평한 큰 돌이다. 높이는 가장 높은 부분이 약 300cm이고 가장 낮은 부분이 115.1cm이다. 폭은 가장 넓은 부분이 175.7cm이고, 두께는 30.3cm에서 51.5cm에 이른다. 직선으로 글자를 둘러싸는 선을 그었으나 정연하지는 않다. 덮개돌[蓋石]은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은 것 같고, 받침돌[趺石]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비문
비면은 자연석 그대로이나 글자가 새겨진 면은 사방을 파고 약간 갈았다. 글자수를 보면 제1행에서 제16행까지는 매행 26자씩으로 되어 있다. 단 제1행은 9자째와 10자째를 비워두었기 때문에 24자로 되어 있고, 제3행은 한 글자가 더 새겨져 27자로 되어 있다. 제17행과 제18행은 한 단 낮게 새겨져 행당 25자로 되어 있고, 제19행과 제20행은 2단 낮아져 행당 24자씩 되어 있으며, 제21행과 제22행은 3단 낮아져 행당 23자씩 되어 있다. 그리고 제23행과 제24행은 4단 낮아져 행당 22자로 되어 있고, 제25행과 제26행은 6단 낮아져 행당 20자로 되어 있으며, 제27행은 7단 낮아져 3자만 새겨져 있다.
비문의 서체는 예서(隷書)와 해서(楷書)의 중간으로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과 흡사하며, 진흥왕의 여타 순수비보다는 고졸(古拙)하다고 한다.
진흥왕의 4비(창녕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가운데「창녕비(昌寧碑)」를 제외한 나머지 세 비의 서두(序頭)에는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표현이 있어서 순수비로 보는 데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창녕비」의 경우에는 모두(冒頭)에 ‘순수관경’이라는 명기가 없어 그 성격을 규정하는 데 여러 가지 견해가 표명되었다. 크게 보아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로 보는 견해, ‘척경비(拓境碑)’로 보는 견해, ‘군신회경비(君臣會慶碑)’ 또는 ‘군신회맹비(君臣會盟碑)’로 보는 견해, ‘전군지휘관회의비(全軍指揮官會議碑)’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비문
본 비에는 진흥왕이 어려서 즉위하였다는 사실이 나오고, 갈문왕(葛文王)·상대등(上大等)·대등(大等) 등 중앙의 중요관직 명칭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대일벌간(大一伐干)을 비롯하여 많은 관등이 나오고, 탁부(喙部)·사탁부(沙喙部)·본피부(本彼部) 등 6부(六部)의 명칭이 보이며, 군주(軍主)·당주(幢主)·도사(道使)·사대등(使大等) 등 중요 지방관직명이 나오고 있다. 또한 사방군주(四方軍主)와 군주의 보좌관인 조인(助人)이 나오며, 촌주(村主)라는 지방유력자(在地有力者)의 직명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이 비문은 이 시기의 정치사(政治史)·사회사(社會史)·제도사(制度史)·군제사(軍制史)의 실상을 밝히는 데 제1급의 사료라고 할 수 있다.
<2010.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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