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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안 홍복사터(弘福寺址, Hóngfúsì)

蔥叟 2009. 10. 4. 08:08

중국 서안 홍복사터(弘福寺址, Hóngfúsì)

 

   홍복사는 당의 현장법사가 서역순례를 마치고 돌아와 처음으로 주석했던 절이다. 장안으로 돌아온후 홍복사, 대자은사, 옥화사를 번역장으로 만들어 수백명의 학자와 화상들과 같이 불경번역 작업을 하였다.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서안시 제39 중학교'가 들어서 있다. 홍복사(弘福寺)에는 회인(懷仁)스님이 왕희지체를 집자하여 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비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회인(懷仁)이스님은 칙령에 의해 궁중에 비장(秘藏)된 왕희지의 법첩중에서 집자한 서이다. 몇몇 조수와 함께 무려 25년간에 걸친 비상한 각고끝에 집대성한 것이다.

 

▲홍복사터(弘福寺址)

  

   변이나 방을 취합하거나 점획을 해체,합병시키거나 했는데, 사진술(寫眞術)도 없던 당시에 그 노고가 어떠했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내용은 당태종이 명승 현장삼장(玄奬三藏)의 신역불전(新譯佛典)이 완성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성교서(聖敎序)와 당시 황태자였던 고종이 그 경전 번역까지의 경과를 적은 술성기(述聖記)와 그리고 현장이 번역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함께 비문을 이루고 있다. 30행에 각 행마다 80여자씩 1904자로 되어 있다. 이 성교서는 당대(塘代)의 모본이기는 하나 왕희지 행서의 진수를 파악하는데 불가결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서(書)는 왕희지의 진적으로부터 집자하여 새긴 천하의 명비로 품격이 높고 형이 정제되어 습벽이 없다. 게다가 용필이 유려하고 다채로와 한없는 정기를 깊이 간직하고 있어 예로부터 행서 입문 에 필수적 교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왕희지의 조형원리는 엄격히 정돈된 구조가 아니고, 부조화(不調和)라고 생각될 정 도로 비뚤어진 형태의 것들이 많다. 그러나, 그 비뚤림은 각도나 용필에 일정한 벽이 없이 종횡무진으로 변화하고 있다. 부 조화속의 조화와 변화의 원칙을 이 집자성교서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집자성교서는 이때 만들어진 원비(源碑)와 송대의 탁본을 가장 귀하게 치는데, 명의 시대에 이르러 원비가 절단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 것을 미단본(未斷本), 그 이후 것을 기단본(己斷本) 이라 구분해 부른다. 

 

▲홍복사터(弘福寺址)

 

   경주남산의 창림사탑에서 발견된 무구정탑원기도 왕희지체를 집자하여 쓴 것이다. 조선 후기 경주를 찾아 원기를 살펴본 추사 김정희는 무구정탑원기의 왕희지체를 보고 감탄하면서 홍복사비문에 견줄만 하다고 하였다. 사라진 홍복사터에서 현장법사와 왕희지체 그리고 추사를 생각하면서 서안답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공항으로 길을 떠난다. 

 

 

 

<2009. 8.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