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함양 당태종 소릉(唐太宗昭陵, Zhāolíng)
중국 산시성[陕西省] 셴양[咸阳]지역에 위치한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능으로 리취안셴[礼泉县] 북동쪽 22㎞지점에 있다. 637년에 시작하여 639년에 완성하였는데, 태종은 완성되고 나서 10년 후에 이곳에 묻혔다. 주준산[九峻山]이 하나의 거대한 능원(陵园)을 이루고 있으며, 주봉(主峰)에 자오링[昭陵]이 있다. 주변에 있는 167개의 작은 산봉우리는 이세민(李世民)의 신하, 아끼던 장수, 부인(夫人), 공주(公主) 등의 배장묘(陪葬墓)이다. 당(唐)의 18개 능원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소릉(昭陵)
▲소릉(昭陵)
▲소릉(昭陵)
주쭝산의 산기슭에는 태종의 딸과 공신(功臣)들의 무덤이 있는데 최근에 발굴되고 있다. 명장 이적(李勣)의 묘지에는 소릉박물관이 설치되어 있으며 석비·묘지석·명기(明器) 등이 있다. 또 소릉의 북문에는 태종의 애마 6필의 석상이 놓여 있었는데, 이 가운데 2필은 미국으로 옮겨졌으며 나머지는 현재 산시성박물관에 있다. 능으로 묘 내부는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지 않는다. 소릉은 깎아지른 벼랑에 나무로 계단을 쌓아 올라가 벼랑 중간에 굴을 뚫은 후 황제의 관과 부장품을 넣었다. 쇠물을 부어 그 입구를 아주 봉한 후 나무 계단에 불을 질러 태워 아무도 들어 갈 수 없게 하였다.
이세민(李世民, 598~649)은 당(唐)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626∼649)로 당나라를 수립하고 군웅을 평정하여 중국을 통일하였다. 공정한 정치로 후세 제왕의 모범이 되었다. 아버지는 이연(李淵:초대 황제)이고 어머니는 두(竇)씨이다. 중국 역사상 유수(有數)의 영주(英主)로 알려져 있으며, 북방민족의 피가 섞인 무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총명하고 사려가 깊으며, 무술·병법에 뛰어난 동시에 결단력과 포용력도 갖추고 있었으므로, 소년시절부터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당태종
▲소릉(昭陵) 능비
▲소릉(昭陵)
수(隋)나라 양제(煬帝)의 폭정으로 내란의 양상이 짙어지자, 수나라 타도의 뜻을 품고 타이위안[太原] 방면 군사령관이었던 아버지를 설득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안을 점령하고 당나라를 수립하였다. 그뒤 군웅을 평정하고 국내 통일을 실현시킨 것은 20세 안팎인 그의 활동에 의한 것이며, 이를 질투한 형 황태자 건성(建成) 및 동생 원길(元吉)과 권력다툼을 벌였고 마침내 그들을 살해하였고, 626년 아버지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당시 당태종의 나이는 28세였다.
당태종은 제위에 오른 다음 연호를 정관(貞觀)으로 고쳤으며 널리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였다. 이어서 돌궐(突厥)을 비롯한 사방의 이민족을 제압하고 여러 민족의 추장들한테서 천가한(天可汗)의 존호를 받았다. 이로써 당나라는 번한(蕃漢)의 양 사회를 포용하는 세계제국이 되었다. 양제의 실패를 거울삼아 명신 위징(魏徵)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심을 누르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지극히 공정한 정치를 하기에 힘썼다. 그러므로 그의 치세는 '정관의 치(貞觀之治)'라 칭송받았고, 후세 제왕의 모범이 되었다.
▲소릉(昭陵)
▲소릉(昭陵)
▲소릉(昭陵)
그는 3성 6부의 중앙관를 두었고 백성에게 땅을 골고루 나누어주는 균전제(均田制)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조용조의 세제, 부병제의 병제를 실시하여 율령격식(律令格式)을 완성하였다. 또한 당태종은 학문과 문화의 애호자이기도 하여 전대의 각 왕조사와 《오경정의(五經正義)》의 편찬을 명하였고, 사서(史書)의 일부는 스스로 집필하였다.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특히 사랑하였고, 그 자신도 유려한 필적을 남겼다. 그러나 좋은 후계자를 두지 못하였고, 만년의 고구려 친정 실패 등으로 그가 죽은 뒤에는 정권이 동요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2002년에는 소릉(昭陵) 근처에서 ''新羅樂浪郡王''(신라낙랑군왕)이라는 글자를 새긴 조각상이 출토됐다. 이같은 사실은 중국 국가문물국(國家文物局. 우리의 문화재청에 해당) 발간 「2003 중국 중요 고고 발현(發現) 발견」이라는 책자를 통해 밝혀졌다. 이책자는 2002년 8월 1차 조사에 이어, 2003년 6-11월 산시성고고연구소가 수행한 ''당 태종 소릉 북사(北司)와 문(門)터 유적'' 발굴 성과를 소개하고 있다.
▲소릉(昭陵)
▲소릉(昭陵)
▲소릉(昭陵)
이에 의하면 당 태종과 장손씨 부부를 합장한 이 소릉 주변 지역 중에서도 북쪽평원에 위치한 북사 및 문터 일대를 발굴조사한 결과 돌을 쪼아 만든 한 인물 조각상 파편들에서 ''新羅樂浪郡王''이라는 명문이 확인됐다. 이 인물 조각상에서 ''新羅樂浪郡王''이라는 명문이 나왔다고 밝히고 있는 점으로 보아, 나머지 조각상 파편에서도 사진으로 제시된 ''新羅'' 및 ''郡''의 글자 일부 외에도 다른 부분의 글씨도 출토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발굴성과는 정식 보고서 발간을 기다려야 할것으로 보인다. 이 책자는 ''신라낙랑군왕''을 포함해 태종 당시, 당 왕조에 번국(蕃國) 혹은 번신(蕃臣)으로 조공(朝貢)한 인근 14개 제후국 왕을 묘사했다고 생각되는 조각상도 출토되었는데 조각상 중 어느 것에 ''신라국왕''이 들어 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않고 있다.
▲소릉(昭陵)
▲소릉(昭陵)
▲소릉(昭陵)
''신라낙랑군왕''은 당 왕조가 신라국왕을 제후로 책봉하면서 준 칭호인데, 「삼국사기」와 「신당서」(新唐書) 및 「구당서」(舊唐書) ''신라전''(新羅傳) 등의 기록에 의하면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년)이 책봉된 이름이며, 이후 27대 선덕여왕(632-647년), 28대 진덕여왕(647-654)도 이 칭호를 이어받았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소릉에서 발굴된 ''신라낙랑군왕''은 당 태종(太宗) 재위 연대(626-649년)를 고려할 때 진평왕과 선덕여왕 둘 중 한 명임은 분명해진다.
소릉은 당 태종 정관(貞觀.연호) 10년(636)에 그의 원비인 장손씨가 사망하면서 조성되기 시작해, 13년 뒤인 정관 23년(649)에 태종이 사망하고 이곳에 합장되면서 공사가 마무리됐다. 태종의 아들인 고종(高宗. 재위 650-683년) 때의 총장(總章. 연호) 연간(668-669년)에는 소릉 주변 지역 중에서도 북쪽에 있는 북사(北司)에 ''14국 번군(蕃君)석상(石像)''을 세웠다고 기록에 전하고 있다. 이번에 발굴된 ''신라낙랑군왕'' 조각상 또한 당 고종 때 건립된 14개 번국(蕃國)군주 중 한 명이다.
<2009.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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