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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보계시 장회태자묘(章怀太子墓)

蔥叟 2009. 9. 23. 17:19

중국 보계시 장회태자묘(章怀太子墓)

    

   중국 산시성[陕西省] 셴양[咸阳]의 첸링[乾陵]에 위치한 장회태자(章怀太子)의 묘이다. 장회태자(章怀太子)의 이름은 이현(李贤)이며, 자(字)는 명윤(明允)이고, 시호(諡號)는 장회태자(章懷太子)이다. 당(唐)고종(高宗, 재위649~683)의 여섯째 아들이며, 중국에서 여성으로 유일하게 황제(皇帝)가 되었던 측천무후(則天武后, 재위690~705)의 둘째 아들이다. 태어난뒤 로왕(潞王)에 봉(封)해졌다가 일곱 살에 패왕(沛王)으로 다시 봉해졌다. 18세에는 이름을 이덕(李德)으로 바꾸고 옹왕(雍王)으로 봉해졌지만, 20세부터는 다시 이현(李贤)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675년 황태자가 되었다가 680년 폐위되었다.  

 

▲장회태자묘(章怀太子墓)

 

▲장회태자묘(章怀太子墓)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한번 읽은 책은 그 내용을 쉽게 잊지 않았으며, 용모나 행동도 단정하여 고종(高宗)의 총애를 받았다. 675년(上元 2년), 고종(高宗)의 병세가 악화되자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섭정(攝政)을 하였는데, 무후(武后)는 황태자(皇太子) 이홍(李弘, 652~675)이 죽자 둘째 아들인 이현(李贤)을 황태자로 세웠다. 고종은 이현에게 나라의 정사(政事)를 감시하는 감국(監國)의 지위를 주었는데, 이현은 정사를 공정하게 처리하여 조정 신료들의 칭송을 받았다. 이 시기에 이현은 <열번정론(列藩正論)>, <춘궁요록(春宮要錄)>, <수신요람(修身要覽)> 등을 저술하였고, 장대안(張大安), 유눌언(劉訥言), 격희원(格希元), 허숙아(許叔牙) 등의 학자들을 소집하여 범엽(范曄, 398~445)이 편찬한 <후한서(後漢書)>에 주석(註釋)을 붙였다. 이 주석은 후대에도 널리 읽혀서, 오늘날 전해지는 <후한서>도 본기, 열전에 이현의 주석을 붙이고, 지(志)에는 양(梁, 502~557)의 유소(劉昭)가 주석을 붙인 북송(北宋, 960~1126) 때의 판본(板本)을 기초로 한다.

 

   이현(李贤)의 황태자 지위를 위협하는 움직임도 궁내에서 나타났는데, 궁인들 사이에 이현이 측천무후의 언니인 한국부인(韓國夫人)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리고 측천무후의 신임을 받던 술사(術士) 명숭엄(明崇儼)은 이현의 동생들인 영왕(英王) 이현(李顯, 656~710)과 상왕(相王) 이단(李旦, 662~716)이 선대(先代) 황제인 태종(太宗, 재위 626~649)에 버금가는 좋은 상(相)을 타고났다는 말을 퍼뜨렸다. 출생과 관련된 소문이 퍼지면서 점차 황태자의 지위를 위협받게 된 이현은 두려움과 근심에 빠져 행동이 난폭해졌다.

 

▲장회태자묘(章怀太子墓)

  

▲연도

 

  680년(調露 2년), 명숭엄이 강도에게 살해되자 측천무후는 이현을 의심해 설원초(薛元超), 배염(裴炎) 등을 보내 조사했다. 그들은 태자궁의 마구간에서 수백개의 갑옷을 찾아내 이현이 모반을 꾀했다고 주장하였다. 이현을 총애하던 고종은 그의 모반혐의를 믿지 않고 사건을 덮으려고 했지만, 측천무후는 폐위를 주장하였다. 마침내 이현은 황태자의 지위를 빼앗기고 폐서인(廢庶人)이 되었으며, 영왕(英王) 이현(李顯)이 황태자가 되었다. 이현의 측근 10여명도 함께 처벌을 받았는데, 장대안(張大安)은 보주자사(普州刺史)로 좌천되었고, 유눌언(劉訥言)은 진주(振州, 지금의 海南省三亜)로 유배되었다. 이현은 장안(長安, 지금의 陝西省西安)에 유폐(幽閉)되었다가, 681년(開耀 원년) 파주(巴州, 지금의 四川省巴中)로 유배(流配)되었다.

 

   683년 고종(高宗)이 죽자 측천무후의 셋째 아들인 이현(李顯)이 당(唐)의 4대 황제인 중종(中宗, 재위 683~684, 705~710)으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684년 중종(中宗)의 황후(皇后)인 위후(韋后)가 아버지 위현정(韋玄貞)과 함께 정권을 장악하려 하자, 무후는 중종(中宗)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넷째 아들인 이단(李旦)을 5대 황제인 예종(睿宗, 재위 684~690, 710~712)으로 세웠다. 그리고 파주에 유배되어 있던 이현이 모반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좌금오대장군(左金吾大將軍) 구신적(丘神勣)을 파견해 감시하였다. 684년 3월, 이현은 자신의 처소에서 죽었는데, 죽음의 원인과 경위에 대해서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으며 구신적(丘神勣)에게 살해되었다는 견해와 구신적의 핍박을 받아 자살했다는 견해로 나뉜다.

 

▲벽화

 

▲마구도(马球图)

 

   이현이 죽은 뒤에 측천무후는 책임을 물어 구신적을 첩주자사(疊州刺史)로 좌천시키고, 현복문(顯福門)에서 이현을 애도하며 다시 옹왕(雍王)으로 봉했다. 706년(神龍 2년), 중종(中宗)은 이현에게 사도(司徒)의 직위(職位)를 추증(追贈)했으며, 그를 건릉(乾陵)으로 이장(移葬)하였다. 예종(睿宗) 때인 711년(景雲 2년)에 이현은 황태자(皇太子)의 지위를 되찾았으며 장회태자(章怀太子)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묘실에는 《객사도(客使图)》, 《관조포선도(观鸟捕蝉图)》, 《마구도(马球图)》 등 50여 폭의 벽화가 있다. 널길 동벽에 그려진 이현이 외국사신을 접견하는 예빈도(禮賓圖)가 주목된다. 이 벽화는 양직공도에 그려진 백제사신도,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궁전 벽화 속의 사절도 등과 더불어 고대 한국인의 옷차림은 물론 폭넓은 국제교류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벽화 왼쪽에 조복을 입고 홀을 든 세 사람은 안내를 맡은 당 홍려시(鴻臚寺)의 관원들이다. 뒤에는 움푹한 눈에 높은 코, 커다란 털모를 쓴 다른 나라 사절들이 있다. 눈이 깊고 머리가 벗겨진 네 번째 사람은 동로마인으로, 여섯 번째 사람은 동북아시아 소수민족으로 보고 있다. 외국사신 중 특히 가운데의 조우관(鳥羽冠)을 쓴 한 사신이 있다. 그는 깃털 2개를 꽂은 모자를 썼으며, 하얀 도포에 흰 띠, 헐렁한 바지에 황색 구두를 신고 있다.

 

▲삼족오(三足烏)

 

▲삼족오(三足烏)

  

   조우관(鳥羽冠) 은 삼국시대에 삼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던 관모이다. 중국의 정사들에도 이 조우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위서(魏書)> 열전(列傳) 고구려조(高句麗條)에, 머리에 절풍모(折風帽)를 썼는데, 그 모양이 변형(弁形)을 하였으며, 새깃[鳥羽]을 꽂았다고 하였고, <당서(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려조에는 "대신의 관모는 청라관(靑羅冠)을 쓰고 다음가는 벼슬 사는 사람은 강라관(絳羅冠)을 썼는데, 이들 비단관에는 양쪽에 조우(鳥羽)를 꽂고 금은으로 장식한 조우관을 쓴다. 윗도리는 통소매이며, 바지는 폭이 넓고, 흰 가죽의 띠, 황색의 가죽신을 신는다" 고 기록되어있다. 아울러 신라, 고구려, 백제의 풍속, 형법, 의복은 모두 같다고 했다.「북사」에는 백제에서 조석 제사에 조우관을 쓴다 했고, 신라 금관의 내관도 두 갈래의 새 깃털을 본뜬 것으로 조우관은 삼국시대 한반도 전역에서 썼던 한국 모자다. 따라서 이 인물은 바로 한반도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조우관을 쓴 이 인물은 신라인인가, 고구려인일가?. 신라인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백제, 고구려는 장회태자가가 태자로 책봉되기 훨씬 오래 전에 멸망했으니(고구려마저 태자 13세 때인 668년에 패망) 그의 생전에 두 나라와 연관을 가졌으리라 추측키도 어렵다. 반면에 신라는 연대적으로도 측천무후 통치기에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새깃털(鳥羽)을 꽂은 관모(冠帽)에 붉은 고름, 넓은 소매가 있는 흰 포복에 속대를 찬 복식의 유사성이 있으니 가장 유력한 후보라 이르기에 무방하다.

 

▲두꺼비

  

▲예빈도(禮賓圖) 

 

   고구려인설의 주장은 이러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기 전인 649년의 관복 개정을 통해 모자와 옷을 당나라식으로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에, 조우관의 인물을 신라인이라고 추정하는 건 모순이다. 당대 유물에 등장하는 사신들의 모습이 실제 상황을 스케치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양식화한 표현’이다. 대당제국이 세계의 중심임을 드러내기 위해 투르크, 위구르, 인도, 고구려 등 주변국의 사신을 도열시킨 장면을 연출한, ‘당나라 중심의 세계관’의 표현이다. 당 중심의 세계관을 표현하는 데 필요한 국가는 삼국 가운데 가장 강성한 대국으로서 장기간 동안 수·당과 대결하며 당나라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고구려다. 그런 까닭에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조우관을 쓴 고구려 사신은 ‘양식화’한 형태로 남아 그림 속에 되풀이 그려졌다는 것이다. 

 

▲예빈도(禮賓圖) 신라사신

 

▲예빈도(禮賓圖) 몽골사신

 

 

 

<2009. 8.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