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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압량리 신라병영유적(新羅兵營遺蹟)

蔥叟 2008. 4. 22. 08:08

 경산 압량리 신라병영유적(新羅兵營)

  

   102년 신라에 멸망한 압독() 또는 압량 소국이 있었다고 전하는 현재의 경산시 압량면에는 압량리 ·내리 ·선화리 등 3개소에 각기 비슷한 형태를 이룬 소규모의 토성들이 남아 있다. 신라의 김유신장군이 압량주 군주로 있을 당시 백제를 공략하고 나아가 삼국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전초기지이자 군사를 모아 심신을 연마하고 무술을 훈련시키던 군사훈련장이었다는 구전이 전하고 있는 3곳의 토성모양 축조물을 합하여 압량유적이라고 한다. 압량유적은 금호강 이남의 넓은 압량벌을 조망할 수 있는 야트막한 구릉선단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공통점이다. 이 유적은  자연구릉상에 얼마간 토축이 이루어져 외견상 토성처럼 보이지만 토성으로 보기에는 소규모이고, 윗면이 평탄하여 광장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광장 한쪽에 치우쳐 토루가 있다는 점에서 장대(將臺)가 있는 군사훈련장으로 추정된다.

 

 ▲압량리 유적(押梁里遺蹟) 전경

 

▲압량리 유적(押梁里遺蹟)

 

   이들은 구릉상의 대지 위에 축조되었는데, 상부는 평탄하고 주위는 타원형을 이루어 멀리서 보면 고대()처럼 보인다. 이곳은 인위적으로 흙을 쌓아올려 지형에 알맞게 만든 것으로 광장은 병사들이 무술을 익히고 심신을 닦는 연무장으로, 토축한 고대는 장군이 병사들을 훈련시킬 때 지휘하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두룩산이라는 말은 두리산[원산(圓山)]으로 두리두리한 산, 즉 '둥근 산'의 지형에서 온 말로 고어(古語)의 두리산(豆里山)에서 유래하였다고 보며, 압량리, 내리, 선화리의 두룩산유적은 인공적으로 광장과 고대를 둥글게 토축한 연무대유적의 형태에서 기인하였다고 하겠다.   

 

▲압량리 유적(押梁里遺蹟) 외경

 

▲압량리 유적(押梁里遺蹟) 외경

  

   압량유적은 서북쪽의 구릉지대에 높은 대를 쌓은 고대식 광장과 동남쪽에는 무덤처럼 흙을 쌓아올려 높은 대를 만든 토축 고대가 연결되어 있다. 고대식 광장은 거의 원형이며 평탄한 넓은 장소를 광장으로 하고있다. 광장은 병사들이 무술을 익히고 심신을 연마하던 장소로 보이며 토축 고대는 장군의 지휘장소로 보인다. 자연구릉상에 흙을 쌓아올려서 마치 성처럼 보이지만 성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작으며, 윗면이 평탄한 광장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군사훈련장으로 보여진다. 다만, 토성을 훈련장으로 이용하기 위해 고쳐 쌓았을 가능성도 있다. 

 

▲압량리 유적(押梁里遺蹟) 장대

 

▲압량리 유적(押梁里遺蹟) 장대

  

   이곳은 642년(선덕여왕 11) 김유신이 군주()로 와서 다스렸고, 655년에는 김인문()이 군주가 되어 장산성()을 축조한 바 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十一年 <庾信>爲<押梁州>軍主 

11년 유신을 압량주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善德王전>

 

三年, <金仁問>自<唐>歸, 遂任軍主, 監築<獐山城>

3년, 김인문이 당 나라에서 돌아오자, 그를 군주로 임명하여 장산성의 축조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太宗武烈王전>

 

 

<太宗大王>授以<押督州>援管{摠管}?. 於是, 築<獐山城>, 以設險, <太宗>錄其功, 授食邑三百戶.

태종대왕이 그에게 압독주 총관을 제수하였다. 이에 그가 장산성을 쌓아 요새를 설치하였으므로 태종이 그의 공로를 기록하고 식읍 3백 호를 주었다.

 

<삼국사기 열전 김인문전>

 

△△△鴻河△以千△之雉堞高墉似錦越夫……太宗大王歡美其功特授食邑三百戶.

(신라에 돌아와) 千△의 雉堞을 (쌓으니), 높은 담들이 비단물결치듯 하였다. … 태종대왕께서 그 공적에 감탄하여 아름답게 여기고는 특별히 食邑 300호를 내렸다.

 

<김인문비>

      

   압량리에 있는  압량리유적은 압량벌을 조망할 수 있는 야트막한 丘陵 선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압량리 유적은 얕은 丘陵 위에 높이 7m로 土築하고 윗면을 평탄하게 하여 원형 광장을 築造한 것으로 둘레가 300m 가량 된다. 이 광장의 동남쪽에 치우쳐 높이 10m의 土壘가 있다. 훈련장은 해발 50∼70m의 능선 정상부를 평탄화시킨 고대식(高臺式) 광장과 원형의 지휘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크기는 장축이 90m정도 되며 지휘대는 저경 8m, 높이 7m의 토축연단형이다.  

 

▲압량리 유적(押梁里遺蹟)

 

▲압량리 유적(押梁里遺蹟)

 

   '압량유적'으로부터 하천이 흐르는 저지대를 건너 약 1.5km 가량 떨어져 있는 내리 유적은 두룩산의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향한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압량벌을 조망할 수 있는 야트막한 丘陵 선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丘陵 자연면에 약간의 土築으로 지름 80m, 둘레 270m 광장을 마련한 것으로, 이 광장의 동남쪽에 높이 15m 가량의 土壘를 쌓았는데, 동남부분이 크게 파괴되어 土壘의 모습을 잃고 있다. 형태는 '압량유적'과 동일 형태로 서북쪽에는 광장이 마련되어 있고, 광장의 동남쪽에는 토축고대(土築高臺)가 연결되어 있다. 광장은 지름이 약 80m되는 둥근 형태로 일부는 경작지로 되어 있고, 나머지 일부에는 민묘가 들어서 있다. 토축고대는 인공적으로 쌓아올린 고분의 봉토형으로 높이는 약 15m이며 동남부의 일부가 파괴되어 있다.

 

▲압량리 유적(押梁里遺蹟) 장대

 

▲압량리 유적(押梁里遺蹟) 장대

   

   '내리유적'에서 약 3km 가량 떨어진 구릉에 위치하며 경산시 진량읍 선화리에 있는 제3연병장도 압량벌을 조망할 수 있는 야트막한 구릉 선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구릉 말단부에 높이 10m 土築의 원형광장(지름 80m)을 구축하고 그 북쪽에 치우쳐 높이 2m, 윗면 지름 13m의 土壘를 쌓았다. 유적의 형태는 두 유적과 거의 같은 형태이다. 광장은 높이가 약 10m, 지름이 약 80m로 자연적인 지형에 약간의 인공을 가해 축조된 원형의 평탄한 장소이다. 현재는 소나무가 많이 있으나 후에 심은 것으로 판단된다. 고대는 높이 약 2m, 지름 약 12m로 흙을 쌓아 올린 토축고대(土築高臺)인데 정상부에는 민묘가 있다. 

 

▲압량리 유적 군사훈련 모형도(경산시립박물관)

 

 

 

<2008.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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