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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마도 이마미야와카미야신사

蔥叟 2016. 2. 24. 08:38

일본 대마도 이마미야와카미야신사

 

今宮 若宮神社,  Imamiya Wakamiya Jinja

 

임진왜란 당시 선봉장이었던 고니시유기나가(小西行長)의 딸인 마리아와 그의 아들을 제사신으로 모신 신사이다. 그래서 마리아 신사라고도 한다. 고니시의 장녀인 마리아는 天正18년(1590) 15세에 대마도주 宗義智의 부인이 되어 금석성으로 시집왔다. 최초로 인본을 통일한 토요토미히데요시 사후 인본 전쟁사에서 가장 유명한 세키카하라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군의 승리로 패장이 되어 처형되자 위협을 느낀 사위 요시토시는 재빨리 동군에 투항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장인이 서군장군으로 처형되었기 때문에 후환을 염려하여 부인 마리아를 나가사키로 추방한다.

 

대마도 도주의 부인으로 있을 당시 투철한 신앙심으로 남편 종의지까지 천주교로 입교시킨 마리아 부인은 1601년 10월 추방되어 나가사키로 돌아간  후에도 독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5년 후인 1606년 사망했다. 元和5년(1619)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부인은 이마미야(今宮), 그녀의 아들을 와카미야(若宮)로 이 신사에 入神시킨 후 제사를 모시다가 후에 天神神社에 合祀되었다. 마리아 신사는 겉으로는 태제부 텐만궁의 한문의 신으로 제사지내는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모시는 것처럼 위장하고 사실은 소서 마리아와 종타리오 사이에 태어나 어려서 죽었다는 전설의 아들과 성모마리아와 예수 즉 하늘의 신과 성삼위일체를 동시에 제사지내는 신사라고 한다.

 

대마도 번주 ‘소우요시토시’는 이마미야 신사에 모신 ‘고니시마리아’의 남편이다. 장인인 ‘고니시 유끼나까’가 죽자 마리아를 버렸던 인물이다. 조선과 일본 본토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대마도의 운명은 정변에 따라 운명이 바뀌는 입장에 놓여 있었으니 그의 입장으로선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마도는 조선과의 무역으로 번성한 곳으로 임진왜란의 전쟁을 직접 겪으면서 양대 국에 끼여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태생적인 운명을 타고 난 것이다. 임진왜란 때 선봉장으로 나섰던 ‘소우요시토시’는 조선과의 관계에서 역사적으로도 그 이름이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임진왜란 직후 조선통신사 초청을 성사시킨 사람이 소오요시토시였다. 일본과 조선의 사이에서 양국의 정세에 따라 흥망성쇠가 결정되는 대마도의 입지 상 그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은 ‘조선과의 화평을 최우선시’ 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마미야와카미야신사

 

▲이마미야와카미야신사

 

▲이마미야와카미야신사

 

▲이마미야와카미야신사

 

▲이마미야와카미야신사

 

▲이마미야와카미야신사

 

▲이마미야와카미야신사

 

▲이마미야와카미야신사

 

▲이마미야와카미야신사

 

 

 

<2016. 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