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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을 찾아서 - 해남 녹우당

蔥叟 2015. 6. 29. 08:09

고산을 찾아서 - 해남 녹우당

 

녹우당은 해남 윤씨의 종가이다. 고산 윤선도의 4대 조부인 효정(호는 어초은(漁樵隱) 1476~1543)이 연동(蓮洞)에 살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사랑채는 효종이 스승인 윤선도에게 하사했던 경기도 수원집을 해상 운송하여 이곳에 이전하여 녹우당이란 이름을 붙였다. 지금은 해남 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녹우당으로 부르고들 있으나 원래는 그 사랑채 이름이 녹우당이다. 'ㅁ'자형을 이루며 안뜰을 둘러싼 안채와 사랑채를 중심으로 행랑채가 여러 동 있고 집 뒤편 담장 너머에 삼신제단이 있으며 그 동쪽에 해남 윤씨의 중시조인 어초은 윤효정과 윤선도의 사당이 있다.

 

녹우당이란 이름은 집 뒤 산자락에 우거진 비자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쏴하며 푸른 비가 내리는 듯하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녹우당의 건축은 풍수지리에 따라 덕음산을 진산(鎭山)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으로 구성되고 행랑채가 갖추어져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형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입구에는 당시에 심은 은행나무가 녹우당을 상징하고 뒷산에는 오백여 년 된 비자나무숲(천년 기념물 제 241호 )이 우거져 있다.

 

녹우당은 덕음산을 뒤로 하고 서향을 하고 있다. 마을 앞 들판이 너무 넓어서 허해짐을 막기위해 마을 입구에 연못을 파고 소나무숲을 조성했다. 연못을 파낸 흙을 쌓아 5개의 가산을 만들었다. 연못 안에는 3개의 섬이 조성되어 연못의 모양은 마음 心자가 된다. 집에 2차례의 화재가 있은 후 어초은의 꿈에 하얀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집터는 산강수약(山强水弱)하니 현재의 안채 자리로 옮기고 물을 만들어 흰 연꽃을 심어라" 하기에 방형의 평범한 형태의 연못을 조성하였다고 한다.그래서 연못의 이름도 백련지(白蓮池)가 되었고 연동마을도 ‘하얀 연꽃이 피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백련동’ 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의 연못은 2002년 복원하였다. 그러나 현재 그 형태는 많이 변형되었고, 옛날에는 연지에 물이 가득 차 물속에 덕음산의 산 그림자가 비추어져야 집안이 잘되고 번성한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녹우당 앞 은행나무는 수령이 약 500년으로 1982년 12월3일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며, 나무의 높이는 20m, 나무둘레는 4.8m 이다. 학자를 상징하는 이 은행나무는 자제들의 과거 급제를 기념하기 위해 어초은 윤효정 때 심어진 것이라고 전한다. 유물관 뒤쪽으로는 세 그루가 더 있다.

 

이 집은 형식과 규모면에서 호남의 대표적인 양반집으로 인정되어 사적 제167호로 지정되어 있다. '녹우당'이 해남 윤씨의 살림집으로 틀을 갖추게 된 것은 고산의 증손자인 화가 공재 윤두서부터 이다. '녹우당'이란 이름도 그때에 지어진 것이다. '녹우당'이라는 이름은 공재의 절친한 친구였던 옥동(玉洞) 이서(李曙)가 녹우당 뒤 산자락에 우거진 비자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쏴~ 하는 소리가 마치 푸른 비가 내리는 듯 들린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녹우당 사랑채는 큰 사랑과 작은 사랑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큰 사랑은 2칸씩의 사랑방과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은사랑은 1칸씩의 책방과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큰 사랑보다 작은 사랑은 반칸 앞으로 돌출되어 자연히 사랑 마당도 두 부분으로 나뉜다. 큰 사랑 마당은 비어있는 의례적인 공간이지만 작은 사랑 앞에는 연못을 파서 아늑한 정원을 만들었다. 하나의 마당을 서로 다른 성격을 갖는 두 개의 공간으로 분할하는 절묘한 배치이다.

 

▲녹우당

 

▲녹우당

 

▲녹우당

 

▲녹우당

 

▲녹우당

 

▲녹우당

 

▲녹우당

 

▲녹우당

 

▲녹우당

 

▲녹우당

 

▲녹우당

 

▲녹우당

 

▲녹우당 은행나무

 

▲녹우당 담장

 

▲녹우당 담장

 

▲녹우당 담장

 

▲녹우당 담장

 

▲녹우당 골목

 

 

 

<2015. 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