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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백제를 찾아서 - 공주 공산성

蔥叟 2015. 6. 1. 06:04

웅진백제를 찾아서 - 공주 공산성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둘레는 2,200m이며, 웅진성(熊津城)·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했다. 금강에 접한 표고 110m의 구릉 위에 석축과 토축으로 계곡을 둘러 쌓은 포곡형(包谷型) 산성이다. 475년 백제 문주왕이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여 538(성왕 16) 사비(泗沘:지금의 부여)로 옮길 때까지 64년 동안 백제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축성시기는 국력이 안정된 동성왕 때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시대에 축조된 이래 여러 차례의 개축을 거쳐서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성의 구조는 석축 약 1,810m, 토축 약 390m이다. 석축산성은 안팎으로 돌을 쌓는 협축방식(夾築方式)을 이용했으며, 내탁외축(內托外築)을 한 부분도 있다. 상단의 너비는 약 70cm 정도이고, 안쪽에는 백회를 발라서 성벽의 석재가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토축산성은 돌을 혼합하여 쌓았는데 대개 높이 1m, 바닥너비 8.5m, 윗면너비 3m 정도이다. 성내에는 깊이 2m 정도의 호()가 형성되어 있다. 서쪽 성벽은 토축된 위에 돌을 쌓아 축조했다. 성에는 진남루(鎭南樓南門)·공북루(拱北樓北門)와 암문(暗門)·치성(雉城)·고대(高臺)·장대(將臺)·수구문(水口門) 등의 방어시설이 있으며, 동문과 서문의 터가 남아 있다.

 

성내에는 영은사(隱寺)·광복루(光復樓)·쌍수정(雙樹亭)·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쌍수산정주필사적비(雙樹山亭駐驆事蹟碑)와 주초석·창고터·연못터 등이 남아 있고, 만하루지(挽河樓址)·임류각지(流閣址)·장대지 등이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동쪽과 서쪽에는 보조산성이 있어 공산성을 보호하고 있다. 공산성은 백제멸망 뒤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던 곳이며, 1623년 이괄의 난 때 인조가 이곳으로 피난했던 일화도 있다.

 

▲공산성과 금강

 

▲공산성 전경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

 

▲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2015. 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