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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백제를 찾아서 - 공주 고마나루 곰사당

蔥叟 2015. 6. 1. 05:55

웅진백제를 찾아서 - 공주 고마나루 곰사당

 

곰나루는 한 어부가 인근 연미산(燕尾山)의 암곰에게 잡혀가 부부의 인연을 맺어 두 명의 자식까지 두었으나, 어부가 도망가 버리자 그것을 비관한 암곰이 자식과 함께 금강에 빠져 죽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고마나루라고도 한다.

 

「곰나루 전설」은 곰나루 지명을 구체적인 증거물로 제시하고 있는 지명 전설이자 인간과 곰이 결연하는 이물교혼담(異物交婚譚)이다. 공주시에서 서북쪽으로 십리 정도 가면, 공주를 싸고도는 금강 기슭에 곰나루라고 하는 나루터가 나온다. 이를 ‘고마나루터’, ‘웅진’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유형으로는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산학리의 「목거리 전설」이 있다.

 

1992년에 공주시·공주문화원에서 간행한 『공주의 맥』과 역시 같은 해 공주문화원에서 간행한 『공주민속』에 실려 있다. 전자에는 수집상황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후자는 1965년에 발행된 『충청남도지』에서 옮겨놓은 것이다.

 

아득한 옛날 지금의 곰나루 근처 연미산(燕尾山)에 큰 굴이 있었다. 이 굴에는 커다란 암 곰이 한 마리 살았다. 어느 날 잘 생긴 사내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물어다 굴속에 가두었다. 곰은 사내를 굴에 가둬 놓고 숲으로 사냥을 나갔다. 그리고 짐승을 잡으면 굴속으로 가져와 사내와 함께 먹었다. 곰과 함께 굴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사내는 기회를 보아 도망치려 하였다. 하지만 곰이 밖으로 나갈 때에는 바위로 굴 입구를 막아놓아 하릴없이 굴속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이렇게 하루 이틀을 지나서 어느덧 이 년 동안 곰과 함께 살게 되자 사내는 곰과 정을 나누게 되고, 그 결과 곰이 새끼를 낳았다. 그로부터 또 일 년이 되어 둘째를 낳자 곰은 사내를 믿기 시작하였다. 사내가 새끼들과 어울려 즐겁게 노는 것을 보면서 더더욱 사내에 대한 믿음이 쌓여갔다.

 

그 날도 곰이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곰은 전과 달리 굴 입구를 막지 않았다. 자식이 둘이나 되는데 설마 도망가랴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사냥터에서 한참 사냥을 하고 있는데 멀리 사내가 강변 쪽으로 도망가는 것이 보였다. 곰은 서둘러 굴로 돌아와 두 새끼를 데리고 강변으로 달려갔다. 사내는 이미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곰은 강가에 다다라 사내를 향하여 돌아오라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사내는 곰의 애원을 외면하고 강을 건넜고, 그것을 보고 있던 곰은 새끼들과 함께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후로 사람들은 사내가 건너온 나루를 고마나루 또는 곰나루[熊津]라고 불렀다 한다.

 

「곰나루 전설」에서는 인간과 곰이 함께 지내면서 새끼까지 낳고 살다가 다시 사람 사는 곳으로 도망 나왔다는 이물교혼 모티프를 볼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의 결연은 신화적 상징성을 함축하여 설화상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소재이다.

 

이와 같은 유형에는 「김현감호(現感虎), 「구렁덩덩신선비」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구렁덩덩신선비」로 사람과 뱀 신랑이 혼인하는 예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뱀이 사람으로 변한다고 하는 점에서 곰나루의 결연담과 차별화된다.

 

백제 웅진기의 지명인 곰나루는 한자로 웅진(熊津)이라 썼으며, 475년 문주왕이 이곳으로 천도함에 따라 백제의 왕도가 되었다. 신라 신문왕 때는 웅천주(熊川州), 경덕왕 때는 웅주(熊州)라 하였으며, 940(태조 23) 공주(公州)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곰나루는 백제 문주왕이 475년 웅진 천도시 이용하였던 교통로였고, 660(의자왕 20) 나당군의 당나라 장군인 소정방이 백제 공격을 위해 금강을 거슬러 와 주둔했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던 곳으로서 백제 역사의 중심 무대이자 국제적 교통의 관문이었다.

 

고려시대에는 현종이 거란의 침략으로 1010년 나주로 피난할 때 곰나루를 이용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이후부터는 남북을 연결하는 중요 교통로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근대적 교통의 발달과 함께 수운을 중심으로 한 이곳의 교통 요지적 기능은 상실되었고, 193311월 금강교가 준공됨에 따라 서해안 지구로 통하는 도강(渡江) 취락적 기능마저 상실되었다.

 

금강의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올리던 웅진단(熊津壇) 터가 남아 있는 등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공식적인 국가의 제사 공간이었으며, 일반 서민들의 주요 생활 터전이자 수상 교통로로서 민중의 정서와 애환이 짙게 서려 있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또한, 곰나루는 금강변에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450여 주의 마을 솔밭이 금강 및 연미산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는 곳으로, 역사 문화적·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경승지로 평가되고 있다. 공주 고마나루는 공주 지역 금강 및 연미산을 포함한 무령왕릉 서쪽으로 전개되는 낮은 구릉 지대와 금강 변 고마나루 일대로 명승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곰사당

 

▲곰사당

 

▲곰사당

 

▲곰사당

 

▲곰사당

 

▲웅신단비

 

▲웅신단비

 

▲곰사당

 

▲돌곰상

 

▲돌곰상

 

 

 

<2015. 4. 19>